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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커↘, 나르시시즘이 만연한 사회는 병폐적이다. 2015-10-07
편집국 jyjang@sisabarotimes.com
'나르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소년의 이름이다. 나르시스는 샘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아름다운 물의 요정이라 생각하여 그것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다가 빠져 죽어 수선화로 변했다고 한다. 나르시시즘은 여기서 나온 말로, 자기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는 일종의 자기 색정(自己色情),자기도취를 뜻한다. 때로는 자의식 과잉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시사바로타임즈= 장 혜 린,장훈녕 기자]

  (에코와 나르키소스)

"'좋아요'를 통해 자기 만족을 느끼는 나르시시즘이 만연한 사회는 병폐적입니다. 나르시즘이라는 자기자신의 늪에 갇혀 익사할 수 있죠, 현대인들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지 않도록 사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너무나 위험하고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까 여러명에게 주식을 사듯 분산투자를 하죠. 우리 사회는 이러한 공허함을 채우기위해 밖에서는 셀카를 찌고 우울증에 빠져 집에서는 자해하는 변태적 사회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베를린 예술대 교수가  이 같이 사랑의 종말을 이야기하며 신간 '에로스의 종말'(문학과 지성사)을 출간했다.  이 책은 오늘날 세계에서 진정한 사랑이 왜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 가를 흥미롭게 분석해 나간다.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눈 속의 사냥꾼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등을 예로 들며 그는 재난으로서의 사랑의 정의를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자기애(自己愛)에 사로잡힌 멜랑콜리커들이 넘쳐나는 우리사회에 한 교수가 사랑에 관한 도발적 주장을 던지며 한국을 다시 찾아왔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경험이다. 필연적으로 자아의 파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두 개인 사이의 가벼운 계약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인에게 '재난으로서의 사랑'은 사라져 버렸다. 그에 따르면 이는 물질주의가 만연한 세속적 욕망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소통 때문이다.

 

한 교수는 "사랑이 프로젝트가 되고 경영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지면 사랑은 죽어 버린다"고 말한다. 그가 이책에서 주장하는 사랑의 재발명은 타자를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의 회복이다. 그는 고립된 젊은 세대들이 SNS를 통해 소통하며 갈등을 언어로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와 한다. 한교수는 친구와 이웃과의 사랑과 연대가 다시 회복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사바로타임즈 편집부


[덧붙이는 글]
*멜랑콜리아는 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이다. '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 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 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 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고영희, 사랑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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